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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도움되는 상식

고려 거란전쟁 1~3차까지 요약

by 노스타우너 2023.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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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契丹)족은 중앙아시아 몽골 평야에서 기원한  특정한 민족 집단으로, 역사적으로 중국과  인근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민족 중 하나입니다. 거란족은 4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초까지 활동했으며, 그들의 역사적인 중심지는 현재의 중국 동북부 및 몽골 고원 지역이었습니다. 

 

거란족
만주지역의 유목민들의 전통을 유지한 변발의 거란족

 

거란족과 요나라

주로 "거란"이란 용어는 중국에서의 명칭으로, 이들은 자신을 "크타이"나 "키타이"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거란족은 여러 국가를 거치면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으며, 역사적인 동북아시아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민족이었습니다. 거란은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고 오랜 세월 고구려인에 동화되었습니다. 이후 거란은 돌궐과 위구르에서 활동하였습니다. 916년 '야율아보기'가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요나라'를 세우고 송나라와 대립하였습니다. 이 때는 한반도의 후삼국 시기였고, 고려 건국 2년 전이었습니다.  거란은 동쪽의 발해를 멸망시키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고, 남쪽 중국 대륙의 왕조들과 교류 및 갈등하며 북방의 강자로 등극하였습니다. 요나라는 993년부터 1019년까지 고려를 쳐들어 왔으나 고려가 승리하여 요나라는 패퇴하였습니다.

 

거란족의 특징

1. 부족 제도와 군사적인 힘: 거란족은 기존 혈연 조직을 재편한 부족 제도를 갖추었으며, 강력한 군사적 힘을 보유했습니다. 특히 10세기에 걸쳐 거란족은 중국 정무에 큰 영향을 미치며, 후지(후두), 즉 거란족의 정권이 여려 차례 중국을 점령하는 등 중국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2. 거란국: 907년 건국된 이라오() 제국은 거란족이 세운 대표적인 국가입니다. 리아오 제국은 중국, 몽골, 시페비라 일대에 걸쳐 영토를 확장했으며, 거란족은 이를 통해 중국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3. 문화적 교류: 거란족은 다양한 문화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중국과 인근 지역의 다른 민족들과의 교류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거란족은 독특한 문화적 특성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거란과 고려와의 전쟁

고려 거란 전쟁은 당대 최강국인 거란제국과 신생국 고려가 맞붙은 26년 간의 전쟁입니다. 993년, 1010년, 1018년에 벌어진 고려의 3차 전쟁은 한국 역사에 큰 충격과 영향을 끼친 사건입닌다. 

 

1차 고려-거란 전쟁

993년(성종 12년) 당시는 성종이 즉위한 이래 내치에 집중하고 있었고, 북방에 대한 축성도 이전 시기보다 줄어들었고, 현지의 여진족 부족들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거란의 동태에 대한 정보 수집도 활발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여러모로 좋지 않은 상황에서 결국 1차 전쟁은 발발하게 됩니다. 

 

거란의 공격이 임박하자 고려에 이를 미리 알려온 여진 부족이 있었습니다. 당시 여진 부족들은 흩어져 살면서 정치적 입장이 달랐는데, 일부는 거란에 협조하였고 일부는 고려에 협조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고려는 이 첩보를 믿지 않았고, 별도로 사실 여부도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여진이 거란의 침공 소식을 알려오자 그때에야 정황을 인지하고 급히 방어 태세에 나섰습니다. 

고려는 첫 전투에서 패하여 봉산군을 잃고 윤서안이 잡혀가는 소실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안융진에서 방어에 성공하고 서희가 협상에 큰 성과를 거둠으로써 전쟁을 원만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당시 거란이 제기했던 고구려의 옛 영토에 대한 요구를 차단하고 아직 통제력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했던 압록강 동쪽 지역에 대해 고려의 영유권을 인정받은 것이 가장 큰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

 

2차 고려 - 거란 전쟁

 

 

거란과 고려는 표면적으로 원만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으므로 거란의 입장에서는 계기가 필요했습니다. 이 계기는 고려 내에서 발생한 1009년 목종 12년 이른바 '강조의 정변'이었습니다. 젊고 아들이 없던 목종이 병이 들면서 후계자 선정이 문제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강조라는 장수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의 폐위.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해던 것입니다. 거란의 황제 성종이 대역을 일으킨 죄인 강조를 처벌하겠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고려 침공을 지시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1010년 (현종 원년) 11월 강조가 목종을 시해한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침공했습니다. 이 때 거란의 진짜 의도는 송나라와 교류를 완전히 막아 고려와 거란간의 관계를 다시 확신시키고, 강동 6주를 되찾으려는데 있었습니다. 거란은 곽주, 안주 등의 성을 빼앗고, 개경까지 함락시켰습니다. 

 

수세에 몰린 고려의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개경을 버리고 나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현종은 피난길에서 갖은 고초를 겪었고, 거란군에 점령된 개경도 크게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현종은 결국 친조, 즉 국왕이 직접 거란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만나겠다는 조건으로 강화를 청하였고, 거란 성종은 이를 받아들여 군대를 철수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거란군도 후방에 잔류한 고려군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피해를 입고 있었으므로, 고려의 요청을 비교적 수월하게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3차 고려 - 거란 전쟁

2차 전쟁이 마무리되었으나, 양국 관계는 안정을 찾지 못했습니다. 고려 측에서 현종의 병환으로 인하여 친조가 불가능하다고 통보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철수한 거란군에게 많은 타격을 입혀다는 자신감에서 그랬을까요. 여하튼 고려는 이러한 입장을 표명하였고, 거란의 성종은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성종은 고려에 강동 6주 지역을 내놓으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거란과 지역을 쟁취하려는 국지적인 전투가 여러 차례 발발했습니다. 고려는 현재의 의주지역을 빼앗기는 손실을 입었으나, 대체로 방어를 잘하였습니다. 

 

그러자 거란의 성종은 다시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하였습니다. 1018년(현종 9년) 거란은 소배압을 사령관으로 삼아 10만 병력으로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습니다. 소배압은 1차 전쟁 당시 사령관이었던 소항덕의 형으로, 2차 전쟁에서는 선봉을 맡은 바 있었습니다.

 

 

거란군의 대대적인 침공에 대해 고려도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현종은 강감찬을 총지휘관으로, 강민첨을 부관으로 임명하고, 그 휘하에 약 20만 8천의 병력을 소집하여 전선으로 투입했습니다. 거란군은 공략이 어려운 홍화진을 우회하여 개경으로 향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강감찬은 거란군이 지나는 길목인 흥화진 인근의 삼교천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하여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습니다. 이때 강감찬이 소가죽으로 물길을 막았다가 터뜨려 거란군을 혼란에 빠트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소배압은 최대한 신속하게 개경을 습격하려 하였으나, 번번이 피해를 입으며 실패를 하고 전력을 잃은 후 철군을 결정하게 됩니다. 1019년 2월 귀주대첩으로 고려는 거란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당시 압록강을 건너 도망간 거란군이 수천에 불과하였다고 하며, 거란군의 시체가 들판을 뒤덮었다고 전해집니다. 

 

전쟁의 결과

거란의 거듭된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고려는 한층 높아진 국제적 위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거란도 고려를 힘으로 누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동안 거란에게 압박당했던 송은 고려의 국력을 재평가하며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전략을 펼쳤습니다. 이러한 국제 정세의 재편 속에서 고려는 거란 및 송과 활발한 교류를 펼치며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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